경향잡지 1986년 9월호 - <이 시대의 순교>

예전에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 관련 글들을 찾아보러 가톨릭 경향잡지에서 검색질하다가 발견한 특정 가톨릭 신자 정치인의 글을 옮겨적어 보았다. 천주교 교회사, 민중신학, 해방신학, 과정신학 등에 대한 예상외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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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잡지 1986년 9월호 - 이 시대의 순교

[모든 것 바쳐 주님의 역사에 동참해야]

토마스 제퍼슨은 민주주의의 나무는 인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말한 일이 있다. 이와 비견해서 참 종교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말하고 싶다.

종교 철학가들은 말하고 있다. 현존하는 모든 고등 종교는 그 출발 당시 저변의 민중 속에 뿌리박고 민중에 의해서 힘을 얻은 종교만이 오늘의 대성을 가져올 수 있었다고. 인류 역사상 수천 수만 개의 종교가 발생했다. 그중에서 오직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 그리고 힌두교만이 전인류적 보편성을 띤 고등 종교로서 성공할 수 있었다.

민중 속에 뿌리박았다는 것은 종교가 그 시발에 있어 민중의 편에 서고 민중의 아픔과 한을 자기 것으로 하고 그들의 영적 사회적 구원에 헌신함으로써 민중의 감동과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고등 종교들은 불가피하게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사회악과 민중 구원의 차원에서 싸워야 했다. 이러한 투쟁은 수많은 순교자를 낳게 했다. 순교자가 뿌린 피는 그 종교를 더욱 영적으로 승화시키고 현세적으로 강건하게 만들었다.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순교에 감동되어 순교자의 뒤를 따랐으며 신앙의 진리를 굳건히 지켜나갔다. 마침내 지배자들은 순교자의 피와 그를 따르는 민중의 힘에 압도되어 그 종교의 포교를 합법화하고 지배층 자신까지도 그 문을 두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순교의 역사 중에도 그리스도교의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고 철저한 것이었음은 역사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그 창시자인 예수님 자신이 이미 순교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창시자의 순교란 불교와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에는 예가 없는 일이다. 예수님은 그 일생을 눌린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당시의 지배계층인 사두가이파, 율법학자, 바리사이파들의 위선과 착취로부터 영적으로 현세적으로 해방시키고자 싸우셨다. 로마 제국의 지배자들과 결탁한 유다 의회인 산헤드린을 둘러싼 이들 지배층은 하느님이 주신 율법의 이름 아래 안식일 정결례 그리고 성전에의 예물 봉헌 규정을 악용하여 민중을 괴롭히고 차별하고 착취했다. 이러한 하느님 모독의 죄악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신을 억압받는 민중과 일체시키고 하느님의 사랑의 증거자로서 단호히 투쟁하셨다. 그러다 마침내 내란을 선동한 정치범으로 몰려서 순교하시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정신은 로마에서의 초기 교회의 역사에 역력히 재현되기에 이르렀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들어와서 3세기 동안 얼마나 많은 박해와 피의 순교를 되풀이했는가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노예, 소상인, 병사 등 당시 로마 사회의 저변 민중들로 구성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들에게 강요된 황제에 대한 우상 숭배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들은 까따꼼바의 지하 묘지를 전전하면서 신앙의 순결을 지키려 애썼다. 불행히 잡혀가더라도 지배자들이 아무리 달래고 위협해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수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혹은 십자가에 못박히거나 혹은 콜로세움의 투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과 순교에의 정열은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결국 인류 역사상 예가 없는 이러한 순교 정신에 공포와 경외심을 느낀 로마의 지배자들은 기원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서 그리스도교를 합법화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철저한 노예 제도, 농민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 그리고 병사와 소상인에 대한 계급적 차별이 성행한 로마 제국에 있어서 하느님 안에 그들은 모두 한 형제요 평등함을 그리스도교는 선포했다. 당시 지중해 세계를 지배한 로마 제국에 있어서 로마 본국인이나 식민지인이나 모두가 하느님 앞에 같은 자유인임을 그리스도교는 주장한 것이다. 3세기에 걸친 탄압을 대하같이 흐르는 순교의 피로써 극복하고 마침내 대 로마 제국을 그 발 아래 굴복시키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그리스도교인의 수는 당시 로마 인구의 10퍼센트 내외밖에 안되었었다. 종교에 있어서의 위대성은 수에 연유한 것이 아니다. 참된 순교의 정신과 그 실행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이제 2백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이 땅은 수천 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을 순교의 제단에 바쳤다. 제단은 순교자의 피로 씻기고 또 씻기었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밖에서 찾아온 신부의 포교에 의하지 않고 이쪽에서 찾아가서 그리스도교를 영입해 온 특별한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이 나라는 아시아 최대의 순교 성인을 낸 영광의 나라다. 오늘날 한국 가톨릭 교회의 인구는 전인구의 5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느 종교나 교파도 한국 가톨릭이 바친 바와 같은 수많은 순교자의 희생을 치른 일이 없다. 그 순교의 힘으로 이 나라에서의 신앙의 자유는 마침내 실현되었다. 조선 왕조 말엽까지 불교도 동학도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지 못했었다. 가톨릭 교회의 이러한 싸움은 우리 국민의 기본 인권인 신앙의 자유를 차지하는 데 있어서 선구자적 공헌을 다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가톨릭 교회의 순교의 역사는 103위의 많은 성인을 낸 성인 국가를 실현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거룩한 교회의 역사는, 한국 사회 전체에 미치고 있는 교회의 영향력이 그 교인수를 훨씬 뛰어넘는 정도의 힘과 존경을 향유하고 있다. 눌린 자가 있는 곳에, 악의 세력이 지배하는 곳에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외침이 있다. 그 외침 속에는 믿음의 조상들이 남기고 간 순교 정신이 맥맥이 흐르고 있다.

순교는 반드시 육신의 죽음에 의한 희생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의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본받고 그를 증거하는 데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순교의 원형은 하느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다가 자기를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다. 순교는 자기가 갖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을 통해서 우리 이웃에게, 그것도 억압받고 고통받는 이웃에게 내놓는 것이다. 재물이나 명예나 노력만이 아니라, 필요하면 자기의 생명까지도 내놓는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그 신앙 때문에 목숨을 내놓아야 할 일은 공산 국가에서의 상황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하느님을 부인하는 무신론이 팽배하고 있으며, 세계 도처에서 정치적 지배자에 의한 또는 경제적 사회적 제도에 의한 민중에 대한 구조적인 억압과 착취와 소외가 성행하고 있다. 이때에 억압과 착취와 전쟁을 반대하면서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의 증거자로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이야말로 참된 순교의 길이라 할 것이다. 순교란 원래 그리스 말에 있어서 증거자를 의미했다고 한다. 목숨까지 바치면서 우리 주 예수님을 증거할 때 우리는 이 시대의 순교의 대열에 동참하는 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교의 대열에의 참여에 있어서 우리에게 제기되는 큰 의문이 있다. 그것은 왜 하느님은 인간의 이러한 순교적 희생이 필요한 사회를 만드신 것일까? 하느님이 참으로 전능하고 선한 분이라면 왜 이 세상에 그토록 수많은 순교자의 희생이 필요로 한 악이 횡행하도록 허락하신 것일까? 이 세상에서 악이 승리하고 선이 패배하는 수없는 사례들을 우리가 눈앞에서 목격할 때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우리들의 의문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여러 번 감옥을 출입하고 일생에 다섯 번이나 죽음의 고비에 직면하는 가운데 이러한 의문과 대결하는 번민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를 풀고자 무던히 노력도 했었다. 물론 이에 대한 답은 하느님이 우리를 연단(鍊鍛)하고 우리를 시험하기 위한 뜻에서 악을 허락하셨다는 '욥기'적인 해석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만일 하느님이 우리를 단련하고 시험하시려면 선(善)만을 세워놓고 가장 높은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경쟁을 시키면 됐지 굳이 악의 창조는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어머니의 태속으로부터 천치 바보로 태어난 사람이라든가 원자탄이 떨어져서 일순간에 생명을 잃은 사람들에게 무슨 하느님의 연단과 시험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문제는 나에게 있어서 참으로 엄청난 신앙상의 시련이요 난문이었다.

결국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대답을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의 진화론적 하느님의 역사 설명에서 해답을 얻게 되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하느님은 이 세상을 처음부터 완전한 것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완성을 인간의 협력을 어어서 이루고자 하신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협력을 얻는 데 있어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의 한복판에 서서 우리를 위로,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며 앞으로 예수 재림의 종말의 날 즉 '오메가 포인트'의 그날에의 도래를 촉진시키는 역사에로의 동참을 위해서 초대하신다. 인간은 누구나 특히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이러한 역사의 협력자가 될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분의 역사에 동참하기위해서 이 세상의 악과 모순 속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놓고 싸우다 보면 그 사람은 순교의 길을 가게 된다. 순교적 노력을 통해서 이 세상은 전진하게 된다. 순교적 희생을 바친 자들은 예수님의 품안에서 구원을 얻게 된다. 순교적 생활은 이 세상 발전의 밑거름이며 예수님의 동역자가 되는 영광의 길이다. 그리고 자기를 가장 값있고 충족하게 사는 유일한 길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장래는 신자 수의 다과에 의해서 결정될 수 없다. 예수님을 증거하고 따르는 순교적 믿음의 생활을 하는 신자와 '교회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오늘의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악과 절망의 와중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목메어 외치시는 이 시대의 순교에의 초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긴 옥중 생활에서 나의 기도와 묵상은 순교에 대한 나의 생각을 음미하고 재정리하게 만들었다. 나는 앞으로 이 세상을 마치는 그날까지 예수님의 증거자로서의 순교적 생활을 미력이나마 나의 정성을 다해서 그분께 바치고자 결심하고 있다.


글: 김대중 (토머스 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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